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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국인 관찰기 - 교육으로 본 영국인
등록일 2014-01-20 오전 11:15:35 조회수 4287
▲ 조정 경기 중인 이튼스쿨 학생들. 이런 팀스포츠를 통해 협동, 규칙, 인내, 복종, 통솔, 공정, 리더십, 스포츠정신 같은 지도자로서의 중요한 품성을 키운다.

엘리트 키우는 사립학교 체육시간이 가장 많아 팀스포츠로 지도자 키운다

영국은 소수의 엘리트층이 끌고 가는 나라다. 좋은 말로 해서 엘리트 사회이고, 제대로 얘기하면 중우(衆愚)정치(mobcracy)라는 평가까지 있다. 여야를 구성하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돌아가면서 정치를 하고 대다수의 국민은 그냥 따라간다. 그 근거로 영국에서는 사회지도층인 엘리트와 일반 국민이 유치원부터 완전히 다른 교육을 받고 성장한다는 점을 든다. 물론 서커스 광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도 못 나온 존 메이저 총리의 자수성가가 드문 예외이긴 하다.

영국인은 이렇게 ‘키워진 엘리트’가 지배하는 사회의 모습에 전혀 반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느낀다. 영국인은 자신들을 이끌어 국정을 운영하거나 사회를 선두해서 나갈 사람은 그만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왕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아 대의정치를 수행한 이후 지금까지 수백 년간 영국 정치인은 공과가 엇갈리긴 하지만 국민의 그런 믿음을 그렇게 실망시키지는 않은 것 같다.

키워진 엘리트들

영국 정치뿐만 아니라 각계의 엘리트들은 대개 사립학교를 나온 중산층 계급 출신들이다. 현재 영국 연립 정부를 이끌고 있는 보수당과 자민당 대표가 대표적인 경우다. 데이비드 캐머런은 보수당 대표답게 역사적으로 보수적 색채를 띤 명문 사립 이튼스쿨과 옥스퍼드대학교를 나왔다. 이튼스쿨은 여왕의 런던 근교 거처 윈저성 바로 앞에 있다. 옥스퍼드는 청교도혁명 때인 1649년 영국 왕으로는 유일하게 사형당한 찰스 1세의 피난 본부가 있던 대학이다.

반면에 자민당의 닉 클레그 대표는 웨스트민스터스쿨과 케임브리지대학교를 나왔다. 두 학교 모두 재야 성향의 자유주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특히 케임브리지는 영국 상류층 청년들이 조국을 배반하고 자발적으로 소련을 위해 일한 낭만파 사회주의자 ‘케임브리지 스파이’ 사건의 주범들이 다닌 학교다. 야당 노동당 대표 에드 밀리반드도 옥스퍼드를 나왔다. 노동자층을 대변한다는 노동당마저 명문학교를 나온 엘리트들이 이끄는 형편이다. 심지어 노동조합도 조합장만 노동자를 내세우지 주요 실무를 다루는 간부 조직원은 명문대학을 나온 엘리트 전문가들이 포진하고 있는 정도다.

엘리트를 키우는 사립학교(Public School) 교육은 공립학교와 많이 다르다. 영국에는 학비가 비싼 학교일수록 공부를 적게 하고 방학이 길다는 말이 있다. 사립학교는 공립학교보다 방학을 일찍 하고 늦게 개학한다. 공립학교 다니는 자녀를 둔 맞벌이 서민 부부들을 생각해서 그렇다고 한다. 돈 많은 사립학교 학생들이 부모와 바캉스를 많이 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빈정거림도 있긴 하다. 어떤 지적이 맞는지는 모르나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인 영국에서 굳이 일 년에 4000만원 이상의 학비를 내고 다니는 사립학교일수록 공부를 안 시킨다는 말은 분명 맞다. 한국 교과 과정에서는 공부가 아니라 과외 활동에나 들어가야 할 과목이 영국은 사립학교일수록 정규 학과목에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체육, 드라마, 토론, 음악, 예술, 견학 등에 할애되는 시간을 다 따져보면 교실에서 하는 수업은 언제 하나 싶을 정도이다.

체육시간이 25% 차지하기도

사립학교 교과 과정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학과목은 체육이다. 그것도 여러 명이 같이하는 단체 운동, 즉 팀스포츠(team sport)가 특히 많다. 과거에는 사립학교에서 주로 럭비와 크리켓(cricket)을 많이 했고 공립학교는 축구와 하키를 많이 했다.(영국 프로축구가 워낙 인기를 끌고부터는 이런 구분이 많이 무너졌다. 물론 아직도 상류층은 축구를 ‘워킹 클래스(working class)’라 불리는 노동자 계급이 좋아하는 운동이라 폄하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이제 영국에서는 계급 구분 없이 누구나 축구를 좋아한다.) 명문 남자 사립학교(영국에는 아직 남녀 구분 사립학교가 많다) 중에는 전 교과 과정의 4분의 1이 스포츠인 경우도 있다. 영국 학교들은 책으로 하는 공부만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팀스포츠는 수준의 차이를 두고 몇 개 팀이 있어 전교생이 무조건 참여해야 한다. 이런 팀스포츠를 통해 협동, 규칙, 인내, 복종, 통솔, 공정, 리더십, 스포츠정신 같은 두고두고 인생에 영향을 끼칠 지도자로서의 중요한 품성을 키운다. 뿐만 아니라 매 학기마다 종목이 바뀌지만 개인 운동도 한다. 수영은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하는 개인 운동이고 승마, 골프, 탁구, 테니스, 육상, 농구, 배구 같은 운동을 개인별로 따로 선택할 수 있다. 이런 선택할 수 있는 운동의 종류가 많을수록 좋은 학교로 친다. 기본적으로 한 학년에 최소한 스포츠과목을 세 개에서 네 개는 한다. 이런 교육을 통해 영국 중산층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평생을 계속할 운동 하나둘을 골라 익히게 된다.

드라마 과목도 학생 전원이 반드시,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참여하게 한다. 전체 학생 수가 100명이 안 되는 주니어스쿨에 드라마 선생이 4명이나 있다. 드라마를 통해 발표력, 담력, 협동심 같은 자질을 수양한다. 또한 말을 할 때 어떻게 해야 전달이 잘되는지, 어떻게 해야 보다 명확하고 거슬림 없이 들리는지도 생각하면서 배운다. 상대방이 말하는 톤에 따라 내가 어떤 식으로 말해야 잘 어울려 관객들에게 극적 효과를 더 잘 전달할 수 있는지도 연구한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나누어 준 지침을 보면 그런 점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 토론하고 연구해 보라고 권하고 있다. 이런 훈련을 받으면 말을 할 때 자기 말에만 도취해서 마구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말을 하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된다. 연극배우나 아나운서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살면서 이렇게 대화방법이나 발성연습을 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영국 사립학교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연극 활동을 통해 이런 좋은 버릇을 몸에 익힌다. 지도자로서 연설이나 발표를 위한 자질을 갖추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영국인들, 특히 저명 인사들은 누구나 참 말을 잘한다. 발음이나 억양까지 아주 부드럽고 매끈하면서 하는 말이 명확하게 들리도록 말한다. 또 어떤 경우에도 횡설수설하지 않고 조리 있게 생각을 정리해서 자신의 의견을 잘 발표한다.

말하고 듣는 법을 배운다

물론 그런 능력에는 토론(debate) 과목이 기여하는 바가 크다. 토론 과목은 어떤 주제를 놓고 논쟁을 해 가면서 말하고 듣기를 배우는 과정이다. 우선 자신의 의견을 효과적으로 피력해서 상대를 설득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토론 수업의 첫째 목적이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보다 이론적이고 체계적으로 내세우기 위해 팀별로 자료를 조사한다. 팀원들끼리 편을 갈라 연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체계화하는 방법을 배운다. 토론과목의 또 다른 중요한 교육 목적은 상대를 내가 설득해야 할 상대로만 보지 않는 훈련을 하는 점이다. 나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훈련도 토론 교육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상대의 말을 잘 듣는 것임을 배운다.
토론 과목에서 가장 재미있는 점은 토론할 주제에 대한 찬반 여부와 상관없이 팀원 구성을 무작위로 배정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신의 존재 유무’를 자신의 종교관과는 상관없이 속한 팀에 주어진 방향대로 토론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이 믿지 않는 바를 어떻게 상대방에게 설득시키느냐가 토론의 묘미이자 가장 큰 도전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토론 수업에서 더 재미있는 반전의 방법도 있다. 토론이 한창 무르익을 때쯤 되어 아주 짧은 준비 시간을 주고 찬반 팀을 바꾸기도 한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극렬하게 반대하던 입장에서 찬성으로 완전히 돌아서서 상대방이 꼼짝못할 논리를 전개해야 한다. 만일 그때 이미 토론 상대방이 썼던 논리를 그냥 차용해서 쓰면 물론 진다. 자신들이 주장해서 이길 만한 논리를 애초에 조사해서 만들면서도 부단하게 상대방이 내세울 이론 근거도 같이 연구해야 한다. 토론은 하루에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면 시일을 두고 다시 연구를 해서 만나 토론을 계속한다.

토론을 심판들이 계속 지켜보면서 중간 중간에 점수를 매기고 최종적인 결론을 봐서 승부를 가른다. 교사들이 심판이 되는 경우도 있고 제3의 학생 팀이 심판이 되기도 한다. 물론 주제를 잘 풀어서 상대를 논리적으로 꼼짝 못하게 하면 이긴다. 그 과정에서 흥분해서 이성을 잃거나 화를 내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하면 아주 큰 감점요인이 된다. 다른 의견을 내세우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내를 가지고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 그 후에 내 의견을 차분하게 피력하는 훈련을 어릴 때부터 받는다. 물론 자신들이 이기기 위해서 상대방을 흥분하게 만들어 화를 내며 실수를 유발하게 하는 작전도 쓴다. 당연히 이때 개인적인 문제를 언급하거나 비속한 말을 쓰면 감점 요인이 된다. 영화에서 많이 보듯이 상대방 얼굴에 코를 거의 들이대고서 화를 돋우는 방법도 그런 전술 중 하나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는 무조건 우격다짐으로는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없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지도 않는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교내에서 토론대회를 하고 이긴 팀을 학교 대표팀으로 뽑아 인근 학교들과 토론 시합을 하기도 한다.

자립심 키우기

영국 상류층은 자립심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자식을 아주 어릴 때부터 기숙사립학교로 보냈다. 영국에서 기숙사립학교가 명문이 된 이유는 시골에 영지를 가진 귀족이나 상류층이 자식 교육을 집에서 시킬 수 없어 기숙사립학교를 찾은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도시의 중산층 부모도 조직 생활을 통해 사회성 있는 인격을 갖고 자립심을 키우라고 겨우 유치원을 벗어날 나이부터 기숙사립학교로 보냈다. 기숙사립학교에는 세계 각지의 영국 해외 식민지에서 근무하는 고급 관리들의 자식도 많다. 이들은 학교 갈 나이가 돼 어쩔 수 없이 고국으로 돌려보내진 경우다.

이렇게 지배계층의 자제들이 공부하러 오는 이유 때문인지 영국 사립학교에서는 유치원부터 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유별나다. 응석을 받아 주어야 할 코흘리개 나이의 아이들도 절대 예외 없이 엄하게 대한다. 유치원부터 정장 양복을 입고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목에 졸라 맨 모습을 보면 앙증맞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일부 남자 초등학교 겨울교복은 반바지이다. 물론 그런 학교일수록 아무리 추워도 교복 위에 코트를 못 입게 한다. 쉬는 시간이라고 해도 복도를 뛰어다닌다든지 교실에서 소리치고 놀다가 걸리면 벌점을 받을 정도로 엄격한 규칙도 있다. 영국의 지식인 중에는 어릴 때 무서웠던 기숙사 생활의 악몽을 두고두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혹독한 규칙을 요구하는 대신에 교사는 아무리 어린 학생이라도 하나의 분명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심지어는 어린 초등학교 학생들을 부를 때 ‘젠틀맨’이라고 정식으로 부르면서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준다. 그런 모습에서는 옛날 중인계급의 아전들이 양반 자제들을 교육시키면서 대하는 태도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부모자식 간에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영국 엘리트 계층은 부모와 자식 간에 정이 없다고들 말한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부모로부터 정을 못 받아 봐 자식에게도 정을 줄 줄 모른다는 말이다.

이렇게 한창 응석 부릴 나이에 부모를 떠나 규칙이 엄한 기숙사에서 교복 입고 단체생활을 하면서 팀스포츠로 인성이 다져지다 보면 개성이 튈 수가 없다. 그래서 기숙사립학교를 나온 영국의 지도층은 감정 절제와 자제에 익숙하다. 표정을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다. 영국에서 사회지도층, 특히 정치지도자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화를 낸다거나 눈물을 보이는 경우는 정말 볼 수 없다. 만일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거의 정치 생명이 끝날 정도로 치명상을 입게 된다. 국가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 정치지도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철하게 판단해서 국가를 곤란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영국인은 믿기 때문이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어린 나이에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으며 슬퍼하는 조문객들에게 되레 예의를 갖추던 윌리엄과 해리 왕자의 태도가 대표적인 경우다. 영국인은 두 왕자의 그런 의연함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어리지만 충분히 존경을 받을 만하다고 여기면서 든든해 했다.

기득권형 인간을 만들다

물론 이런 엄격한 사립학교 교육을 ‘몰개성화 교육(sterilization education)’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어린 학생들에게 그렇게 불편한 교복을 입히고 사랑으로가 아니고 엄하게만 다루면서 쉬는 시간마저 친구들과 장난도 못 치게 해 ‘애어른’을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영국의 엘리트들은 자신이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고 또 그렇게 해야 자신의 자식들도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춘다고 생각한다. 비판하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소위 완전히 몰개성화된 ‘기득권제도 인간(institutional person)’으로서의 자질 말이다. 영국의 사회지도층은 이런 사람들이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인간형이다. 우리 조선시대 선비라는 사람들과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영국 엘리트들을 보면서 한다. 의관을 갖춰 입고 예의를 한껏 차리면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근엄한 인간형 말이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서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도 희생할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조선의 양반들이 유교 교육을 통해 그런 인간형을 만들었다면 영국은 아직도 사립학교 교육을 통해 그런 인간형을 만들어 낸다.

영국인들은 이런 사람들이 자신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다. 한 시대 전의 아버지상처럼 비록 인간적이지 못하고 살갑지는 않아도 바위처럼 쉽게 흔들리지 않아서 믿고 기댈 수 있었던 가부장적인 지도자를 영국인은 아직도 원한다. 대처 총리 때 헬리콥터 공장을 해외에 매각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당시 국방장관 마이클 헤즐타인은 대처 총리와 심각하게 부딪쳤다. 아무리 국방에 중요한 공장이라도 적자를 내고 회생의 가능성이 안 보이면 외국에라도 팔아야 마땅하다는 것이 대처의 일관된 논리였다. 내각 내에서는 감히 누구도 대처의 주장에 토를 못 달았는데 유일하게 헤즐타인 국방장관은 언론 플레이까지 하면서 대들었다. 결국 내각에서 표결에 부쳐져 다수로 매각 결정이 나자 헤즐타인은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사의를 표명하고 나와 버렸다. 당시 헤즐타인은 대중적 인기도 높았고 당내에서 따르는 사람이 많아 차기 총리감으로 유력했었다. 그 다음날 신문들은 만평에 자신의 별명 타잔(타잔과 비슷한 모습과 헤어스타일 때문에)처럼 헤즐타인이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 창문으로 줄을 타고 날아서 탈출하는 장면을 그렸다. 대처의 국영기업 매각에 반대하는 국민 사이에는 폭발적 인기를 얻었지만 즉흥적이고 극단적인 성격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다수의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결국 정상 근처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하고 말았다.

혜성처럼 등장한 지도자는 없다

영국에는 어느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서 이미지나 바람만으로 총리가 되는 경우는 없다. 다음 총리가 누가 될 것이라고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검증된 현 정권의 제2인자가 대개 다음 지도자가 된다. 대처 총리가 인두세(poll tax)로 인기가 떨어져 물러날 때 의원총회에서는 다음 보수당 대표로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존 메이저를 별 논란 없이 뽑았다. 영국 내각 재무장관은 제2인자 자리다. 총리라고 해도 임기 중에 이 재무장관을 함부로 바꿀 수는 없다. 이렇게 오랜 시간 검증을 거쳐야 거물로 성장할 수 있다. 이래서 영국인을 보수적이라고 말한다. 보수란 기존의 것을 지키려고만 하고 새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쓰는 말이 아니다. 보수는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결정을 한다’는 뜻에 더 가까운 말이다. 영국인은 모든 일을 신중하게 한다. 그래서 영국인을 보수적이라 말한다면 그렇게 불려도 영국인은 꺼려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자랑스러워할지 모른다. “나는 사고와 원칙에서는 급진주의자이고, 방법과 실행에서는 보수주의자이다.(I am a radical in thought (and principle) and a conservative in method (and conduct).)” 비록 미국 19대 대통령 러더퍼드 헤이스가 말했으나 마치 영국인이 한 말 같다.

주간조선

글쓴이 권석하

IM컨설팅 대표. 영남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 무역상사 주재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유럽 잡지를 포함한 도서와 미디어 저작권 중개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월간 ‘뚜르드 몽드’ ‘요팅’, 도서출판 학고재 등의 편집위원도 맡았다.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Watching the English·학고재)’을 번역 출간했다. 영국 국가 공인 관광가이드시험에 합격, 관광가이드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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