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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국의 '요리 혁명'에 미식가들 열광
등록일 2015-04-20 오전 10:45:31 조회수 4469

[Why] 피시 앤드 칩스는 잊어라… 영국의 '요리 혁명'에 미식가들 열광

 

세계의 요리를 품다… 미식의 진화 주도하는 영국

- 217년 전통의 식당 '룰스'
에드워드 7세가 앉았던 창가 자리가 그대로…
"식당 원형 유지 위해 해마다 수억원 투자"

- 창의적인 요리도 주도
정어리로 만든 셔벗, 베이컨·달걀 아이스크림… 미식계의 혁명 일으켜

- 파리지앵도 열광
파리 수퍼마켓 선반엔 영국産 즉석식품 가득… 3코스 요리도 간편식으로

2005년 7월 3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가 정상회담차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 모였다. 화기애애한 휴식 시간, 시라크 대통령이 자리에 없는 영국을 험담하기 시작했다. 사흘 후 싱가포르에서 2012년 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위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가 예정돼 있었다. 파리가 유력했고, 런던이 막판 추격 중이었다. 시라크가 "영국이 유럽에 기여한 것이라고는 광우병밖에 없다"며 말을 꺼냈다. 두 정상이 껄껄 웃자 한발 더 나아갔다. "영국 사람은 믿을 수가 없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는 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믿습니까. 핀란드를 빼고, 영국 음식이 제일 맛없어요."

그의 뼈 있는 농담은 근처에 있던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 기자의 귀에 걸려들었다. 기사가 나가자, 영국 전역에 분노의 광풍이 몰아쳤다. 전 언론이 시라크의 외교적 결례를 비판하며 "가장 맛없는 나라로 조롱당한 핀란드가 뜨거운 맛을 보여주라"고 부추겼다. 핀란드는 IOC 총회에서 2표나 갖고 있었다.

핀란드의 표가 판세를 갈랐던 것일까. IOC 중간보고서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던 파리는 50표를 받아 54표를 얻은 런던에 졌다. 파리가 잃어버린 일자리가 6만개로 추정된다고 영국 더타임스는 보도했다.

시라크의 설화(舌禍)는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하지만 시라크를 비판하는 이들도 '맛없는 음식' 대목에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 음식? 생선 튀김에 감자튀김 얹은 피시 앤드 칩스 말고 다른 게 있나요?"

그들은 몰랐다. 영국이 서서히 변해왔다는 것을. 이제 영국은 특정한 '영국 요리'가 아니라 어디서나 환영받는 '요리'로 세계를 리드하고 있다.


	영국 런던에서 217년째 영업 중인 레스토랑 ‘룰스’의 종업원이 손님들에게 스테이크를 잘라 건네 주고 있다. 아래 사진은 영국 전통 요리 중 하나인 스코치 에그(Scotch Egg). 18세기 중반부터 먹기 시작한 음식으로, 삶은 달걀을 고기 반죽으로 감싸 튀긴다.
영국 런던에서 217년째 영업 중인 레스토랑 ‘룰스’의 종업원이 손님들에게 스테이크를 잘라 건네 주고 있다. 아래 사진은 영국 전통 요리 중 하나인 스코치 에그(Scotch Egg). 18세기 중반부터 먹기 시작한 음식으로, 삶은 달걀을 고기 반죽으로 감싸 튀긴다. / 사진가 이승준
'혁명'하느라 바빠 요리할 시간이 없었다오

지난달 22일 영국 런던의 대규모 전시장 엑셀런던에서 국제 식품박람회인 'IFE(Internatioal Food&Drink Event)'가 막을 올렸다. 2년마다 개최되는 IFE는 영국 최대 음식 행사 중 하나다. 올해 참가국은 57개국. 식료품의 유엔총회라 할 만했다. 100여개의 부스를 지날 때마다 대륙 하나를 건너듯 새로운 맛의 지도가 펼쳐졌다. 아프리카의 닭수프, 한국의 소주도 있었다. 따로 마련된 즉석 코너에서 모로코의 요리사가 나와 닭찜 시식회도 열었다. '맛없다'는 영국이 가장 다채로운 맛을 끌어들이는 자력의 중심이 된 것이다.

예전 영국은 내세울 맛이 없었다. 그들에게 맛을 앗아간 주범은 산업혁명이다. 18세기 중반 영국은 산업혁명의 들불이 번져가던 '세계의 공장'이었다. 도시인은 물론이고 지방 농민까지 모두 공장으로, 기계 앞으로 일하러 나갔다. 각박한 일과에 식사는 뒷전이었다.

미식은 습관이다. 후천적으로 혀에 익힌 맛이 있어야 먹고도 싶고, 만들고도 싶어진다. 지금의 영국 50대 이상에게 요리란 소중한 노동 시간을 가져가는 불필요한 행위였다. 맛을 승화시키는 소스? 그런 걸 조릴 시간은 없었다. 조리법은 두 가지. 삶거나 구웠다. 큼직한 살코기를 썰어서 먹다가 생겨난 전통 음식이 로스트 비프다.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영국 음식이 뒤처진 이유를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서 찾았다. '혁명'에 바빴던 영국에는 맛있는 음식을 찾는 사람, 즉 수요가 없으니 공급이 없었고, 그런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다 음식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크루그먼 교수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1983년 런던의 고급 레스토랑에 갔더니 '주문을 받고 나서 조리한 음식을 먹고 싶으면 미리 알려달라'는 말을 들었다"며 "지금은 런던이 맛으로 가장 글로벌한 도시가 됐다"고 감탄했다.

크루그먼을 놀라게 한 힘은 한때 세계의 절반을 지배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포용력에서 나왔다. 영국은 모든 나라의 음식을 받아들였다. 영국의 40대는 20·30대에 세계 여행을 다니며 맛에 눈을 떴다. 프랑스와 중동 등 이민 인구가 대도시 런던으로 몰려들었다. 런던에는 인도, 중동, 북아프리카 음식점 등이 공존하고, 수준이 뉴욕보다도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식까지도 포용했다. 2012년 런던에 1호점을 낸 한식 전문점 '비비고'는 올해 초 2호점을 열었다.

영국의 전통과 뿌리는 철저히 지킨다. 대표적인 레스토랑이 코번트 가든 인근의 '룰스(The Rules)'다. 1798년 토머스 룰이 개업해 217년째 영업 중이다. 지난달 22일 오후 4시 찾아간 룰스는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내부는 묵직한 고동색 탁자와 사슴 머리 장식으로 고전적인 품위가 있었다. 에드워드 7세가 왕세자 시절 여러 여배우를 유혹하기 위해 전용으로 썼다는 창가 자리는 그때 장식 그대로다. 단골이던 작가 찰스 디킨스와 윈스턴 처칠의 초상화도 걸려 있다.

20년간 룰스에서 일하고 있는 경영 담당 이사 리키 맥메너미는 "영국의 전통(legacy)을 후세에게 전한다는 사명감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경영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문을 닫고 새 레스토랑을 여는 것이 이익이다. 겉으로는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 해마다 수억원을 투자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요리사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헤스턴 블루멘털. 요리에 과학을 접목해 늘 새로운 요리를 선보인다. 그의 레스토랑 ‘팻 덕’은 2004년 미슐랭가이드에서 최고점인 별 세 개를 받았고, 2006년 세계 50대 레스토랑 중 1위에 뽑혔다. 현재는 공사중. 영국 역사에서 아이디어를 찾는다는 그는 메뉴판에 영감을 받은 요리사와 시기를 일일이 적어 놓는다.
전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요리사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헤스턴 블루멘털. 요리에 과학을 접목해 늘 새로운 요리를 선보인다. 그의 레스토랑 ‘팻 덕’은 2004년 미슐랭가이드에서 최고점인 별 세 개를 받았고, 2006년 세계 50대 레스토랑 중 1위에 뽑혔다. 현재는 공사중. 영국 역사에서 아이디어를 찾는다는 그는 메뉴판에 영감을 받은 요리사와 시기를 일일이 적어 놓는다. / 마스터셰프오스트레일리아
전통과 역사를 뼈에 새겨 혁신을 이룩하다

요리사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 중 하나가 요리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영국은 그러한 상상과 혁신에서 앞섰다. 룰스 같은 고전적인 레스토랑이 있는가 하면 가장 창조적인 식당도 한 도시에서 숨 쉰다. 미국 주간지 타임이 '가장 창의적인 요리사'로 칭했던 헤스턴 블루멘털(49)의 '디너(Dinner by Heston Blumenthal)'다. 베이컨과 달걀로 만든 아이스크림, 정어리로 만든 셔벗으로 미식계에 혁명을 불러일으킨 블루멘털은 레스토랑'팻덕'으로 미슐랭가이드 최고점인 별 세 개를 받았다. 스페인 '엘 불리'와 쌍벽을 이루던 팻덕은 연내 재개장을 목표로 개조 공사 중이다.

미슐랭 별 두 개를 받은 블루멘털의 '디너'는 하이드파크가 내다 보이는 호텔 만다린 오리엔탈에 있다. 지난달 23일 '디너'의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을 오픈하니 '역사'가 열렸다. 대표 메뉴인 '고기과일'(Meatfruit, 과일처럼 보이나 닭고기로 만들었다)'부터 디저트로 나오는 치즈까지, 그가 영감을 받은 14~18세기 시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블루멘털의 오른팔로, 디너의 헤드 셰프인 애슐리 팔머 왓츠는 "역사에 잠자고 있는 엄청난 정보와 지식을 현대의 식탁에 되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며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영감을 받아 재창조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귤 같지만… 헤스턴 블루멘털의 대표 요리인 ‘고기 과일(Meatfruit)’. 겉보기엔 귤이지만, 잘라보면 닭고기다. 블루멘털이 16세기 영국 요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17.5파운드(약 2만8000원).
귤 같지만… 헤스턴 블루멘털의 대표 요리인 ‘고기 과일(Meatfruit)’. 겉보기엔 귤이지만, 잘라보면 닭고기다. 블루멘털이 16세기 영국 요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17.5파운드(약 2만8000원). / 애슐리팔머왓츠
블루멘털이나 팔머 왓츠 같은 요리사들이 영국 미식의 최전선을 이끄는 동안, 미식에 갈증을 느낀 대중은 간접체험, 즉 TV에 빠져들었다. 영국의 토요일 오전 케이블TV에는 음식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여태껏 못 먹고, 못 만든 한을 분출하는 대리만족의 시간이다. 그러다 보니 영국에는 음식을 통한 오락이 발달하게 됐다. 미슐랭 별 세 개를 받은 고든 램지는 카리스마와 욕설로 요리사들을 훈육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요리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지만 친근한 외모와 엔터테이너 기질을 가진 제이미 올리버는 요리 교육과 사회사업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알렸다.

올리버는 2002년 레스토랑이자 교육 프로그램인 '피프틴'을 세웠다. 불우 청소년들에게 전액 무료로 요리를 가르쳐 재기할 기회를 준다. 피프틴의 음식은 완벽하지 않다. 메뉴 중 김치가 재료로 쓰인 요리가 있어 반가운 마음에 주문했다. 돼지고기 한 조각과 삶은 달걀을 배추김치 위에 얹은 엉성한 요리가 나왔다. 그런데도 피프틴에는 유니폼이나 주방 도구를 기부하겠다는 독지가들이 끊이지 않는다. 제이미올리버음식재단 CEO인 닐 로벨은 "음식 교육의 핵심은 한 인간으로서의 책임감"이라며 "요리한다는 것이 삶을 뒤바꾸는 놀라운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영국 로고 이미지
지난해 10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의미심장한 기사를 냈다. 시라크의 2005년 발언을 서두에 다시 소개하며 "10년이 지난 지금, 파리의 선반은 영국 요리로 뒤덮여 있다"고 보도했다. 유통체인점인 막스 앤드 스펜서나 웨이트로즈 등에서 수출한 즉석식품이 파리의 수퍼마켓을 점령했다는 뉴스였다. 간단하게 먹는 데에 일가를 이룬 영국이 간편식을 고급 레스토랑 음식 수준으로 만들어내자 파리지앵들이 열광한 것이다. 블루멘털은 웨이트로즈를 통해 호텔에서 나올 법한 근사한 3코스 요리까지 선보였다.

영국 음식의 신선한 바람은 우리 곁에도 와 있다. 최근 서초구 서래마을에 문을 연 영국식 카페 '파크로얄'은 주말이면 예약을 잡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몰려든다. 오는 9월 성북동에 '현대 영국 음식 전문점'을 표방하는 새 레스토랑도 생긴다. 이상훈건축연구소의 이상훈(43) 소장이 여는 '우물우물'이다. 영국에서 건축사 자격증을 받은 이 소장은 "런던에서 유학하던 1990년대 후반 영국 음식의 독특한 가치를 발견했다"며 "최상의 재료를 특별한 장식 없이도 신선하고 맛있게 내는 영국식 요리를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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